어제는 아침에 일어나서 피부과 갔다가 집에 와서 똘이 데려나가 미용 맡기고
백화점에 가서 점심 먹고 화장품 사고 옷 사고 다시 똘이 데려와서
집에서 기시 유스케 <자물쇠가 잠긴 방>을 읽다가
오노 사토시 나오는 <열쇠가 잠긴 방> 드라마를 보다가 잠들었다.
오늘은 아침에 일어나서 목욕을 했다. 샤워는 맨날 하지만 목욕은 가끔 한다.
어제 키엘에서 샘플로 엄한 걸 자꾸 집어 주길래 바디로션을 달라고 했고,
오늘 목욕하고 그걸 바르려고 필름지를 뜯었는데 아뿔사 코코넛 향이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코코넛을 좋아했다.
그래서 엄마랑 피지 갔을 때도 코코넛 빈껍질이랑 새끼 코코넛을 잔뜩 주워왔다.
코코넛오일이랑 바디로션도 사오고 리조트에 있는 코코넛 비누도 챙겼다.
동물의 숲에서도 해변가에 코코넛이 떠밀려오길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다.
파주에서 혼자 지낸 겨울에는 코코넛밀크 통조림을 사서 퍼먹곤 했다.
코코넛 슬라이스도 좋아하고 코코넛 청크도 좋아한다.
한달 전만 해도 누비안헤리티지 코코넛 비누를 사서 기쁘게 썼다.
그런데 지난 주 월요일부터 코코넛이 싫어졌다. 이유는 말하고 싶지 않다.
아무튼 코코넛 때문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던 그날,
제주도 때문에 지옥에 떨어졌다 겨우 빠져나온 지 일주일 된 그날,
나는 공지원한테 전화를 해서 '내 코코넛이야. 내 코코넛이란 말이야. 내 코코넛' 하면서 울었다.
다시는 코코넛이 들어간 어떤 음식도 입에 대지 않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랬던 코코넛인데 생각지도 못한 데서 튀어나왔다.
그냥 버릴까 했지만, 어차피 냄새도 맡았고 먹는 건 아니니까 괜찮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실수였다. 엄청남 냄새다. 나는 코코넛의 화신이 되었다.
엄청나게 큰 코코넛 과육 속에 들어갔다 나온 기분. 아니 이것은 코코넛과 섹스한 기분.
앞으로도 하고 뒤로도 하고 옆으로도 하고 그러다 코코넛과 혼연일체가 되어 실신한 기분.
나한테서 코코넛 냄새가 나는 걸 엄마도 알고 똘이도 알고 거실 다육이들도 다 알아챘다.
일주일 전이었다면 '내가 코코넛이다. 코코넛이 됐어!' 춤이라도 췄겠지만 이젠 아니다.
코코넛 냄새는 나를 다시 지옥으로 데려갈 것이다.
'엄마 나 어떡하지. 코코넛 냄새 계속 나.'
'너 코코넛 좋아하잖아.'
'아냐. 이제 싫어하잖아. 내가 말했잖아.'
'그러게 왜 발랐어. 그냥 버리지.'
'아까워서 발랐지. 다시 샤워할래.'
'물이 더 아까워. 나는 이제 면역이 생겼나봐. 잘 안나는데.'
'아냐 장난 아니야. 코코넛 냄새 나니까 자꾸 생각나.'
'그런 것도 다 극복해야 돼. 근데 그 코코넛 맛있었는데.'
극복하라니. 엄마가 나한테 극복하라고 하다니.
내가 정말 고난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실감이 났다.
그래도 못참겠어서 다시 샤워하려고 일어나다 시슬리 바디크림 생각이 났다.
오뒤스와르와 스와르드륀. 둘 다 손톱만큼만 발라도 하루 종일 향기가 났더랬지.
스와르드륀을 듬뿍듬뿍 짜서 팔부터 덧발랐다. 코코넛 냄새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감춰졌다.
코코넛 냄새가 안나니까 살 것 같다. 정말 살 것 같애? 아니 하나도 안 그렇다.
아무것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위로를 찾는 것도 귀찮다.
어제 공지원이 12월에 세미누드인지 찍자고 몸만들라고 했는데
들을 땐 의욕이 마구 생겼으나 오늘 코코넛 냄새 한 번 맡고 나니까 안드로메다로 가 버렸다.
내일 깨끗하게 샤워하고 나면 기분이 좀 나아질지도 모르겠다.
죄인의 마음으로 살겠다고 마음먹었지만 쉽지 않다.
불쑥불쑥 생각이 나면 미치고 팔짝 뛸 만큼 괴로워진다.
한번 생각에 사로잡히면 거기서 잘 빠져나오지 못하는 편이라 더 큰일이다.
그동안 내가 한 잘못들, 양심의 가책 없이 저지른 부적절한 짓들을 떠올리는 게
지금 감정을 다스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내가 더 잘못했다. 내가 만든 결과다. 누구의 탓도 해서는 안 된다.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기 위해 온힘을 다하고 있다.
그러면서 엄마와 똘이와 친구들에게 의지한다.
다음주 수요일은 10월의 마지막 날이다. 비가 온다고 한다.
제주도와 코코넛을 떠올려도 더 이상 괴롭지 않은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