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 예들은 참 많다.
이것도 아마 그 가운데 하나일 텐데,
'천재와 노력가'
나는 작가를 만날 때마다 어느 쪽인지 혼자 가늠해 보곤 한다.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이겠지만 특히 예술은 타고난 감각이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크다.
스스로를 작가라고 여기는, 혹은 작가가 되고자 하는 이들은 천재 또는 노력가, 둘 중의 하나이다.
둘 다 해당사항이 없다면 굳이 이 바닥을 선택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책이 나오더라도 특A급 작가가 아닌 이상,
선인세는 일반적인 월셋방 보증금보다도 적다.
인세로 생활하는 것? 책 '몇' 권이 '제대로' 터지기 전엔 어렵다.
작가들에게 책을 낸다는 건 돈보다도 꿈을 좇는 일이다.
그리고 약간의 명예도.

요즘엔 그림책 작가가 되려고 유학을 다녀온 일러스트레이터들도 많다.
우리가 지금 작업하고 있는 신인들만 해도
영국, 체코, 뉴욕, 일본을 거쳐 한국에 온 친구들이 몇 명 된다.
그림책 작가가 꼭 '배고픈 예술가'일 이유도, 필요도 없지만
좋은 환경에서 잘 배워 훌륭한 포트폴리오를 들고 나타나는 신인들을 볼 때면
(게다가 대부분 그들은 외모도 뛰어나다)
나도 모르게 상대적인 빈곤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게 선입관으로 작용해서 그들의 작업을 폄하하는 일은 없다.
뉴욕에서 날아왔든, 홍대 반지하에서 버스 타고 왔든
좋은 작품은 그냥 좋은 작품일 뿐이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고.
어쨌든 집안의 경제력이나 개개인의 매력과는 상관없이,
작가들 대부분은 천재와 노력가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얘기.

사실 편집자 입장에서는 일할 때 '말 잘 통하는 천재'가 최고 편하다.
하지만 '한결같은 노력가'는 천재들과는 다른 힘이 있다.
편집자를 숙연하게 만드는 어떤 것.
그림이 영혼의 깊이를 담아낸다고 하면 너무 거창하지만,
그런 진정성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는데
나는 오랫동안 그 진정성이 천재들만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을 전율하게 하고, 감동을 주는 건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이번에 홍성찬 선생님과 작업을 하면서 내가 틀렸다는 걸 알게 되었다.




홍성찬 선생님은 1929년에 태어나(어슐러 K. 르귄과 동갑이다)
50년대부터 잡지에 삽화를 그린 우리나라 1세대 일러스트레이터다.
신문, 잡지로 시작해 7,80년대에는 전집류와 초등학교 교과서에 그림을 그렸다.
우리 집에는 아직도 선생님이 그림을 그린 1980년판 계몽사 문고 '지저세계 펠루시다'가 있다.
출판 관계자들은 농담 반, 지금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모든 세대가
한 번쯤은 홍성찬 선생님의 그림을 보았을 거라고 말한다.
하지만 동시대에 활동했던 이우경 선생님이 돌아가신 뒤에도
'시대를 뛰어넘는 세련된 선'으로 여러 사람들의 사랑을 받는 것에 비해,
홍성찬 선생님에 대한 관심은 '1세대 풍속화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우경 선생님이 천재였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내 주변에 몇 있지만,
홍성찬 선생님에 대해서는 어깨를 으쓱하며 '글쎄, 난 별로...' 라는 반응이 대부분니니까.
나 역시 선생님과 계약을 했을 때 기대보다 걱정이 더 컸다.

작년 9월에 계약을 했고, 올해 5월에 원화 작업이 끝났으니 딱 9개월이다.
그동안 선생님은 스케치를 17번이나 다시 하셨다.
보통 신인들이 6번쯤 수정을 하다 지쳐 떨어지는 것과 비교하면 놀라운 일이다.
지팡이에 의지하지 않으면 걷기 힘들고, 펜을 쥔 손은 조금씩 떨린다.
몇 년 사이 디스크와 백내장으로 세 번이나 수술을 받았고
당뇨로 식사를 조절하는 몸은 가시처럼 말랐다.
80이 넘은 노작가와 '열심'이란 표현은 그다지 어울리지 않지만
선생님은 정말 열심히, 성실하게, 온 마음을 다해 그림을 그린다.
동세를 수정해 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몇 번이나 다시 그려 보여 주셨다.
가을, 겨울, 봄이 지나 완성된 원화 열여섯 장면은
'종이 위에 존재하는 온전한 세계' 였다.
나는 한 번도 그림을 보고 그런 느낌을 받은 적이 없다.
이야기에 맞게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라
원래 이런 세계가 있고, 그걸 그대로 옮겨온 것 같은 느낌.
선생님의 모든 것이 그 안에 있었다.



                                                                                                                  할아버지의 시계 ⓒ 홍성찬 2010


혼례식 장면을 잘 살펴보면 젊은 시절의 선생님과 무척 닮은 사람이 있다.
가장 왼쪽에서 두 번째, 배레모에 안경을 쓴 풍채 좋은 아저씨. 
선생님이 맞느냐고 여쭤보니 겸연쩍게 웃으셨다.
아마 이 장면을 그릴 때 선생님은 꼭 이런 표정으로 웃으셨을 것이다.
진정성은 기법이나 기교, 천재적인 감각과는 다른 문제이다.
나는 선생님을 통해 그것을 배웠다.
그 생각을 할 때면 내 안의 무언가가 활짝 열리는 기분이 든다.
우리 책이 선생님의 대표작이 되기를 바라지만,
선생님은 더 이상 펜을 잡을 수 없게 될 때까지 그림을 그리시겠다니
어쩌면 더 굉장한 작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 책도 우리가 내야 할 텐데 나는 살짝 조바심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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