엠뷸런스를 보고

2008. 3. 27. 20:25 ** 내 몰스킨


나는 엠뷸런스를 딱 한 번 타봤다. 재작년 1월이었다.
진통제 한 갑(이래봐야 여덟 알)을 한꺼번에 먹었는데 '죽던지 아프던지 어떻게든 되라'는 마음이었다.내가 먹은 건 암씨롱이었다. 아줌마들이 잔뜩 나와서 "아암, 암씨롱~"하고 광고했던 암씨롱. 쌍시옷과 이응 받침이 연달아 있어서 어쩐지 말하고 나면 민망한 세 음절, 암씨롱.
게보린이나 타이레놀을 잔뜩 먹고 싶었지만 그 때 내가 구할 수 있는 진통제는 아암, 암씨롱 한 갑뿐이었다.
뭔가 행동으로 옮겨야겠다고 마음먹으면 항상 조급해진다. 나는 무난한 이름을 가진 진통제를 사러 멀리 떨어진 약국까지 가고 싶지 않았다. 혹시라도 마음이 약해질까봐 좀 불안하기도 했다. 그리고 만약 내가 조금 이따 죽는다면 그까짓 알약이 암씨롱이든 게보린이든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암씨롱 여덟 알을 먹고 삼심 분이 지나자 속이 메스껍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리 여섯 시간을 토했는데 나중엔 코에서 위액이 나오는 것 같았다. 토하다가 횡경막이 찢어져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싫었다.
결국 밤 열한 시에 내 손으로 엠뷸런스를 불렀다. 구급 요원이 물었다.
"무슨 약 먹었어요?"
"진통제요."
"진통제 뭐요?"
나는 차마 암씨롱이라고 대답할 수 없었다.
그 방정맞은 이름을 말하는 순간,
내 어설픈 자살 시도가 만천하에 드러날 것 같아 진심으로 부끄러웠다.그는 또 물었다.
"왜 먹었어요?"
나는 배가 아파서 먹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여덟 알을 한꺼번에 먹었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응급실에 도착하자 구급 요원이 간호사에게 내 상태를 전했다.
"배가 아파서 진통제를 먹었대요."
아니나 다를까 간호사가 다시 내게 물었다.
"환자분, 진통제 뭐 드셨어요?"
나는 대답 대신 구역질을 했다. 간호사는 집요하게 물었다.
"무슨 약을 먹었는지 알아야 치료를 해요."
나는 망설였다. 죽으려고 한 게 들통날까봐 그런 것이 아니었다.
퉁퉁 부운 얼굴로 응급실 간이 침상에 누워서
'암씨롱'을 발음하고 싶지 않았다.
입 밖으로 내어버리면
어디선가 아줌마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아암~ 암씨롱!"하고 추임새를 넣을 것만 같았다. 그 모습을 본 간호사들이 '어쩜, 경박하기도 하지' 키득거리며 비웃을 것 같았다.
다시 구역질이 올라왔다.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했다.
"아... 아암씨이..로옹이요."
차라리 재빨리 말하는 것이 나을뻔 했다. 잔뜩 늘어진 일곱 음절의 마지막 '옹'은 정말 최악이었다.
간호사는 '암씨롱?' 하고 되묻더니 데스크에 대고 큰 소리로 말했다.
"이 환자분 암씨롱 드셨대요."
나는 모든 것을 포기했다. 이제 몇 번이라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원하는 답을 들은 간호사는 다시는 내게 묻지 않았다. 그리고 왜 약을 먹었는지 사실대로 말하라고 추궁하지도 않았다.
내 옆에서는 농약을 드신 할아버지가 위세척을 하고 있었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젊은 사람보다 늙은 사람의 죽음이 더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대로 진토제 주사를 맞고, 몇 가지 검사를 하고, 다음날 퇴원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처럼 과거의 나한테 돌아갈 수 있다면, 죽고 싶어한 이현주에게 뭐라고 말해주는 게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쉽지 않다. 죽겠다는 생각은 정말 앞 뒤가 꽉 막혀 있어서 무슨 말을 해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도 누군가는, 무슨 말인가 해 주어야 한다. 안 그러면 정말 죽어버릴 지도 모르니까. 그렇다면 나는 기다리라고 말 해주는 게 좋을 것 같다.
"기다려, 이현주! 기다려 봐. 내가 기다리고 있어."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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