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이 날 땐 언제나 윤쥬현. 윤쥬현이 최고다. 오랜만에 윤쥬현한테 전화해서 한바탕 울어 제끼고, 이불에다 콧물을 잔뜩 뭍히고 잠깐 잠이 들었다가 억지로 일어나서 81년생과 영화를 보러 나갔다. 정말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는데 영화마저 최악이었다. 집중이 안 되서 자꾸만 딴 생각이 났다.(모던보이였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버스를 타고 동네에 왔다. 도봉산 입구에 있는 두부집에서 두부 보쌈에 소주 1병을 먹었다. 영화는 공짜로 봤으니 밥은 내가 사야겠다 싶었는데 자기가 밥을 살테니 맥주를 사라길래 알았다고 했다. 내가 빠른 81이니까 당연히 누나인 게 맞는데 대학 졸업을 코앞에 둔 81은 이제 나랑 맞먹어도 되겠다 싶었는지 자꾸 말 중간에 '누나' 대신 '너'라고 했다. 모르는척 해 버렸다.
밥 먹고 나와서는 나한테 맥주를 사라길래 캔맥주나 먹자고 했다. 사실 엄마한테 카드를 뺐겨서 술집에 가는 게 부담스러웠다. 우리는 캔맥주를 사들고 동네 놀이터에 자리를 잡았다. 그 놀이터로 말할 것 같으면 나와 81이 졸업한 중학교 옆에 붙어있는, 도봉동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우리들의 랜드마크 같은 곳이다. 물론 그전에는 이렇게 맥주를 마신 일이 전혀 없었다. 나이드는 건 우습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비록 우리는 몇 년 동안 연락 한 번 하지 않고 지냈지만 부모님들끼리는 제법 교류가 있어서 대강 사정은 알고 있다. 81과 나는 서로 부모님 안부를 묻고, 조카들 사진을 구경하다가 아주 자연스럽게 연애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별로 말이 없는 나는 오늘도 역시 듣는 쪽이었다. 마냥 어리게만 생각했던 81은 그동안 연애를 몇 번 한 모양이었다.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나는 계속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또 울어 버릴 지경이었다. 정말 답답하고 한심하고 화가 났다. 내가 얘기를 건성듣는 걸 눈치챈 81이 핀잔을 주었다. 그리고 갑자기 반말을 하는 것이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런 거 정말 민망하고 어색하다. 무슨 귀여니 소설도 아니고. 나는 81을 좋아하는 건 아니지만 싫어하지도 않는다.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난감했다. 그래서 그냥, 알았어 더 만나 봐. 라고 말해 버렸다. 81은 입고 있던 후드 짚업을 벗어서 나한테 걸쳐 주었다. 화목하고 지극히 정상적인 가정에서 나는 집 냄새가 났다. 조금 있다 우리집 대문 앞까지 나를 바래다 준 81이 불쑥 손을 내밀었다. 그러고는 몸을 굽혀서 나한테 입을 맞추었다. 맙소사! 이해할 수 없다. 5년 만에 얼굴 보고 오늘이 두번 째 만나는 건데 나를 좋아한다니. 뭘 얼마나 봤다고. 날 얼마나 안다고. 그리고 입은 왜 맞춰?
하지만 어쩌면, 이건 내가 그토록 바라던 평범한 연애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왠지 뭔가 큰걸 잃어 버리는 기분이 든다. 내가 이 남자애와 어젯밤 꾼 꿈 이야기를 재미있게 할 수 있을까? 같이 동물원에 가서 오랑우탄을 보고 말 없이 오래오래 서 있을 수 있을까? 내가 좋아하는 영화나 만화나 음악이나 그런 것들을 같이 즐길 수 있을까? 나는 잭블랙이랑 손현주가 너무 섹시해 보이는데 이런 날 이해할까? 내가 죽으려고 한 적이 있다는 걸 얘는 상상이나 할까? 우리는 전혀 다른 우주에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걸. 집에 들어오자 조금 있다 전화가 왔다. 81은 예전부터 나를 좋아했다고, 그래서 지금 기분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그리고 보고싶다고 하길래 방금까지 봤잖아, 라고 애교없게 대꾸해 주었다. 전화를 끊고 나니 갑자기 81이 부러워졌다. 좋겠다 너는.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한테 고백도 하고 입도 맞추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