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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 9. 28. 00:03 ** 내 몰스킨


집중해서 원서를 보고 있는데 바로 전 직장에서 친하게 지냈던 언니한테 전화가 왔다.
언니는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으로 종종 내게 전화를 한다. 문자도 많이 보낸다.
나는 전화기를 꺼 놓거나 밧데리를 빼 놓거나 무음으로 돌려 놓는 때가 많아서
뒤늦게 전화나 문자가 왔다는 걸 확인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모르는 번호가 찍혀 있으면 일부러 안 받을 때도 많다.

오늘은 불어에 정신이 팔려서 전화기는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오랜만에 언니의 전화를 받을 수 있었다.
언니는 한 시간이 넘게 그동안 자기가 겪은 일들을 말해 주었다.
전화로 수다 떠는 걸 좋아하진 않지만, 또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라서
나는 펼쳐 놨던 사전을 덮고 침대에 누워 언니 이야기를 들었다.
전화기가 뜨거워졌을 무렵, 언니는 개운해진 목소리로 전화를 끊었다. 

갑자기 언니가 부러운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 따뜻한 전화기를 쥐고 어디 전화할 데가 없나 생각해 보았다.
언니처럼 내 얘기를 실컷 하고나면 기분이 좀 후련해지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뿌린대로 거두리라는 옛말은 틀린 게 없어서
전화기를 내팽겨쳐두는 내가 편하게 전화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국 공지원에게 '어딘가 전화를 하고 싶다'는 내용으로 문자를 보냈다.

공지원은 늘 1분 안에 답장을 보낸다. 그럴 때면 내가 참 불성실한 친구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문자를 두세개 주고받다가 공지원이 내게 전화를 걸어서 통화를 시작했다.
나는 어쩌구저쩌구 했다고 말했고, 공지원은 이러저러 하라고 말해 주었다.
공지원은 또 이러저런 일이 있었다고 말했고, 나는 그렇게저렇게 하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날씨가 추워지니까 갑자기 더 외롭다는 이야기를 했다.
둘 다 완전 동의해 버려서 누구 입에서 먼저 나온 말인지는 까먹었다.

언제나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비슷비슷하다. 
남자 얘기, 연애 얘기, 자는 얘기, 부인과 질병에 관한 정보들, 가끔씩 옛날 남자들 얘기.  
오늘은 '연애할 때 보통 얼마나 통화를 하느냐'는 내 질문에 공지원이 대답해 준 게 특별했다.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다들 시간이 나면 주저없이 애인과 통화들을 하는 모양이었다.
그러면서 공지원이 내게 물었다. '그럼 너는 목소리 듣고 싶을 때가 없어?'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나도 분명히 누군가의 목소리가 너무 너무 듣고 싶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 대상은 내가 전화를 걸 수 없는 상황에 처해 있을 때가 많았다.
군대에 있거나 외국에 나가 있거나 이미 헤어졌거나 지금 다른 사람과 있거나.
결국 나는 점점 좋아하는 사람에게 전화하는 걸 어색해하게 된 것 같다. 고 생각한다.
그리고 전화 통화가 내게 '온전한' 만족감을 준 적도 거의 없었다.
그렇게 따지면 연애 이력 자체가 그렇지만.  

갑자기 외로운 생각이 들거나 위로가 필요할 때는 나도 통화를 하고 싶다.
불행하게도 그런 외로움은 여자 친구들과 통화하는 걸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럴 때는 대부분 꾹 참거나, '전화하고 싶다'고 일기를 쓰는 걸로 대신 하지만
가끔은 아주 큰맘 먹고 전화를 건다. 물론 절대 외로워서 걸었다고는 말 안 한다.
뭔가 쌩뚱맞은 걸 물어 보거나, 어쩔 때는 잘못 걸었다고 거짓말도 한다. (멍청이)
전화를 걸었다가 마땅히 할 말을 찿지 못해 어색해지는 게 싫기 때문이다.

역시 가장 마음 편한 것은,
아까 공지원이 말했듯이 기대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태도의 가장 큰 단점은
아까 공지원이 덧붙였듯이,
계속 외롭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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