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2008. 8. 12. 09:48 ** 내 몰스킨

나는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태어났다. 중학교 3학년 때 원래 집을 허물고 2층 집을 새로 지었는데 그 때 넉 달간 다른 집에 있었던 것을 빼면 단 한 번도 이사를 해 본 적이 없다.

우리 동네, 작은 변두리 마을은 도봉산 아래에 있지만 국립공원 입구와는 꽤 떨어져 있어서 등산객의 발길이 거의 닿지 않는 한적한 곳이다. 게다가 동네의 80%가 그린벨트로 개발제한구역이라 납작한 슬레이트집이나 20년 이상씩 된 구식 연립주택들이 많다.
지금도 그렇지만 하루 종일 들리는 소리라고는 새소리와 두부장수 아저씨의 종소리, 과일 트럭의 확성기 소리, 수업 끝난 아이들이 떠들며 집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전부인 조용한 동네에서 나는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우리 집은 동네보다도 훨씬 조용했다. 부모님은 사람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명절 때 친척들이나, 가끔 오는 책장사 아저씨를 빼면 찾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아침이면 외할머니가 화단에 물주는 소리에 잠을 깨고, 나른한 오후에는 옥잠화 위를 날아다니는 벌이 윙윙거리는 소리가 안마당까지 들렸다. 나는 차가운 마루에 배를 깔고 엎드려 고구마를 먹다가 낮잠이 들었다. 선뜻한 기운에 문득 깨면 엄마의 도마 소리, 아궁이에 솥뚜껑이 덜그럭대는 소리……. 해가 지면 대문 옆에 있는 화장실에 가기가 겁이 나서 나는 엄마 몰래 작은방 부엌에서 오줌을 누곤 했다.

어릴 적에 있었던 일을 모두 다 기억하고 있지는 않다. 몇몇 이미지들이 꿈처럼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 가장 자주 떠올리는 것이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의 어느 아침이다.
방학숙제였던 식물채집을 하려고 나는 외할머니를 따라 뒷산에 올라갔다. 이른 아침이었기 때문에 풀잎마다 이슬이 맺혀 있어서 중간쯤 올라갔을 때는 종아리가 흠씬 젖어있었다. 다리를 털고 고개를 들었는데 순간 아찔했다. 나뭇잎들마다 햇빛을 반사해서 온 세상이 반짝거리는 것 같았다. 초록색은 동네와 하늘과 할머니를 눈부시게 했다. 그리고 할머니는 내 앞에서 순식간에 커다란 사람이 되었다. 마치 동화책에서 나온 산신령 같았다. 할머니는 버섯을 따서 내게 보여주셨다.
“이렇게 뒤집어서 보면 먹을 수 있는 버섯인지 독버섯인지 알 수가 있지. 이건 우산버섯이야. 그리고 이것 봐라, 푸석푸석하지? 먼지버섯은 먹는 게 아니야.”
이건 우산버섯이야, 우산버섯이야, 이건 밤버섯이야, 밤버섯이야, 먼지버섯은 먹는 게 아니야, 먼지버섯은 먹는 게 아니야……. 나는 잊지 않기 위해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할머니가 한 말을 반복했다. 그렇게 하다보면 이야기들이 음식물처럼 입안에서 씹어져 목을 타고 내려간다. 그리고 배가 간질간질해진다. 이야기가 배에 새겨진 것이다. 그 날의 버섯분류는 할머니가 내게 해 주신 다른 옛날이야기들과 함께 배에 잘 새겨졌다.
해가 완전히 떠서 등에 땀이 나기 시작했을 때, 할머니와 나는 풀과 버섯을 가득 따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이후에 풀을 어떻게 말려서 숙제를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할머니를 따라 산을 올라가던 순간의 초록빛과 커다래진 할머니의 음성이 뚜렷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 날의 이미지는 내 정서 가장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무슨 생각을 하던 눈부신 초록색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그다음은 원색의 분꽃이다. 예전엔 동네 집들마다 담장 아래에 얕게 흙 담을 쌓아 꽃이나 채소를 심었다. 우리 집은 분꽃을 심었는데 노란색, 자주색, 흰색, 연분홍 점박이 꽃이 있었다. 분꽃은 작은 나팔꽃처럼 생겼고, 꽃받침을 떼어 꽃술을 뽑으면 피리가 된다. 살짝 입에 물고 불면 삐이- 하는 소리가 나는데 워낙 작고 얇은 꽃이라 몇 번만 불면 입에 닿은 부분이 누렇게 변해 시들었다. 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나는 해가 질 때만 분꽃 피리를 불었다. 어둑어둑해지면 가장 안 예쁜 꽃을 하나 따서 피리를 불고 손으로 짓이겨 쌉쌀한 꽃잎 냄새를 맡곤 했다. 손톱 밑이 자주색이 될 때까지 분꽃을 가지고 놀았다. 분꽃은 약국 놀이를 할 때도 쓸모가 있었다. 꽃이 시들고 나면 까만 씨앗이 달리는데 생긴 것이 꼭 환약 같다. 깨물면 퍼석하면서 하얀 즙이 나온다. 아주 쓰다. 나는 분꽃 씨앗을 따서 흰 종이에 싸 ‘약’이라고 써 놓곤 했는데 할머니는 항상 내 약을 가져다 담 밑에 새로 심으셨다.
분꽃은 늘 피어 있었다. 원할 때 언제든지 만질 수 있는 유일한 꽃이었다. 야합수 꽃은 예뻤지만 높은 곳에 있어서 딸 수 없었고, 황매화는 화단 끝에 있어서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 라일락은 너무 빨리 피고 졌다. 장미 나무엔 항상 거미가 있었고, 나는 다알리아 꽃이 무서웠다. 커다란 보라색 꽃송이가 입을 쩍 하고 벌릴 것 같았다. 내 키가 닿는 곳에 있는 작고 촌스러운 분꽃이 좋았다. 따뜻한 바람이 부는 저녁에 분꽃 옆에 앉아있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조금 더 자라서는 아카시아를 좋아했다. 우리 동네에는 유난히 아카시아가 많았다. 6월이 되면 보이는 것은 산마다 하얀 아카시아 꽃이다. 열 살 때, 두발 자전거에 보조바퀴를 달아 막 자전거를 배우기 시작했는데 나와 함께 그 해의 아카시아가 피기 시작했다. 고목나무의 아카시아는 열매처럼 주렁주렁 열린다. 앞산에도 뒷산에도 산들은 하얗게 아카시아를 달고 있었다. 페달을 밟으면 아카시아 바람이 코로 씽씽 들어왔다. 그러면 나는 그 냄새가 너무 좋아서 더 빨리 달렸다. 저 산 밑에서 동네 끝까지 몇 번을 돌아도 힘들지 않았다.
해질 무렵이 되면 아카시아는 마술처럼 향기를 퍼트려 온 동네가 아카시아 숨을 쉬었다.  나는 집에 돌아와 방에 누워있다가도 마당으로 달려 나가 아카시아 냄새를 맡았다. 숨을 들이마시면 몸속에서 ‘좋아한다’는 감정이, 어떤 대상도 가지지 않은 단어 그대로의 감정이 솟아나 순식간에 가슴에 퍼지곤 했다. 한번 숨을 타고 내 몸으로 들어온 아카시아는 다시 나갈 줄을 몰랐다. 나는 그 감정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자전거를 타고 더 힘껏 달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중학교에 가서부터는 아카시아가 필 때 마다 몸살을 앓았다.

나는 지금도 여전히 아카시아를 좋아한다. 하지만 더 이상 그 때처럼 어쩔 줄 몰라 하지는 않는다. 내 안에 있던 ‘아카시아 마음’이 사춘기를 지나며 첫사랑에게, 또 수학선생님에게 조금씩 날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벌써 10년도 전에 우리 동네는 골목길 까지 콘크리트 포장을 했는데 공사를 하면서 대부분의 화단이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 집 분꽃도 그 때가 마지막이었다. 작은 화분에 옮겨 심어 놨으면 좋았을 껄 가끔 안타까운 맘이 들지만, 역시 분꽃은 화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외할머니는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명아주, 봉숭아, 의숭화, 각시풀, 삐리, 부초, 돌나물, 우산버섯, 먼지버섯……. 도봉산 가는 길엔 아직도 할머니가 이름을 가르쳐주신 들풀들이 담장 밑에, 풀 섶에 반갑게 나와 있다. 그 앞을 지날 때 마다 나는 옛날처럼 하나씩 이름을 외워 보곤 한다. 그리고 간질간질 배에 새겨진 할머니 목소리를 들으며 혼자 웃는다.

서울의 끝에 있는 작은 변두리 마을, 나는 한 번도 내가 이곳과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기억하는 모든 것들이 여기에 닿아 있다. 결국 나의 이야기는 우리 집의 이야기이고, 우리 동네의 이야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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