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몰스킨

31시간 30분

8yllihc 2013. 3. 20. 19:30

 

3월 12일 --------

 

오전 9:05
사무실에서 교하도서관으로 출발.

책 한 권을 다 읽고 와야 하는데, 도서관은 1시간만 무료 주차라 근처 공원에 차를 세우기로 함.

 

오전 9:15
공원 주차장 도착. 전면주차 하려고 들어가다 경계석 앞 볕 드는 곳에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 발견.

차가 가까이 가도 꼼짝하지 않음. 그대로 차를 대면 안 될 것 같아 일단 시동을 끄고 내려서 고양이를 살펴봄.

새끼는 아니지만 보통보다 왜소한 몸집에 정수리 털이 군데군데 빠졌음.

까만 털, 까만 발, 노란 눈. 코는 불투명한 콧물로 범벅이 되었고 눈곱도 심함.

차에 치인 건 아닌 것 같은데 겨우 숨이 붙어 있는듯 위태로워 보임.

 

오전 9:17
어떻게 해야 할지 바로 판단이 서지 않음.

병원에 데려가도 방법이 없는 게 아닐까? 내가 끝까지 책임질 수 있을까?

 

오전 9:18
선배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이야기 함. 병원에 데려가기로 마음먹음.

 

오전 9:20
고양이를 들어 올리려고 하자 움찔하더니 손을 빠져나감.

내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사이 옆 차 밑으로 들어가 숨어 버림.

 

오전 9:25
손도 닿지 않고 나뭇가지로 몰아 보아도 소용없음. 차주에게 전화해서 차를 빼달라고 하려다 포기.

그대로 두고 도서관에 가기로 함. 만약 내가 돌아올 때까지 니가 여기에 있다면, 그땐 꼭 데려갈 거야.

 

오전 10:40
도서관에서 책 검토. 집중이 잘 안됨. 회사가서 마저 읽으려고 그냥 대출해서 나옴.

 

오전 10:50
주차장에 오자마자 차 밑부터 확인. 고양이가 보이지 않음.

혹시나 싶어 경계석 쪽으로 가 보니 처음처럼 바닥에 웅크리고 있음.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한번에 안아 올림. 무게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볕을 받은 털이 따뜻하다.

 

오전 10:55
급한대로 조수석에 지도를 깔고 그 위에 고양이를 눕힘.

동물병원까지 신호등이 세 개. 파란불 두 번, 빨간불 한 번. 고양이가 숨쉴 때마다 쉭쉭 소리가 들림.

 

오전 11:02
동물병원 도착. 다행히 범백에 감염된 것은 아니지만 탈수가 심하고 호흡기에 문제가 있다고.

앞발에 정맥주사를 놓으려고 했으나 혈관이 잡히지 않음. 대신 포도당을 주사기로 빨아들여 입안에 넣어 줌.

코를 뒤덮고 있는 콧물을 닦아 줌. 항문이 열려 몸을 움직일 때마다 똥이 조금씩 흘러나옴.

 

오전 11:25
하루 입원을 시키고 상태가 나아지면 집에 데려가서 치료하기로 함.

무슨 일이 있으면 전화달라고 부탁하고 사무실로 돌아옴.

 

오후 3:10
파주에 비가 내리기 시작.

 

오후 5:58
동물병원에서 전화가 옴. 내일 오전에 사체를 찾으러 가겠다고 함.

 

 

3월 13일 --------

 

오전 8:45
출판단지 도착. 사무실 들어가기 전에 고양이 묻어 줄 자리를 보아 둠.

회사 앞 상수리 나무 근처. 죽은 새들을 묻는 자리 어딘가즈음.

새는 꽃삽으로도 충분히 땅을 팔 수 있지만 고양이는 진짜 삽이 필요하겠지.

사옥 뒤에서 관리 실장님이 쓰시는 큰 삽을 찾아냄.

 

오전 10:15
종이 상자를 하나 챙겨서 병원으로 출발.

 

오전 10:25
의사 선생님이 냉동고에서 고양이를 꺼내 줌.

흰 시트로 꼼꼼하게 감싸서 얼굴도 꼬리도 발도 보이지 않음.

딱딱하고 차갑고 어제보다 무거운 느낌. 종이 상자에 담아 병원을 나옴.

 

오전 10:40
상자를 상수리나무 앞에 두고 땅을 파기 시작.

 

오전 10:55
그럭저럭 눈대중이 맞아 고양이를 바로 눕힐 정도가 됨.

다시 흙을 덮고, 다지고, 돌이나 풀을 올려 놓으면 너무 눈에 띌까봐 낙엽만 조금 긁어다 덮음.

 

오후 4:45
외근이 있어 일찍 퇴근. 마지막으로 인사.

 

 

 

 

 

**

병원에 데려갈 때 조수석에 웅크린 모습을 찍을까 하다가 찍지 않았다.

찍으면 안될 것 같았다. 그 상황을 이용하는 기분이 들었다.

죽기 전에 몇 시간 병원에서 머물렀던 것이 고양이한테는 좋은 일이었을까.

오후에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리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병원에 데려가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안그러면 몸 가릴 데도 없이 차가운 비를 다 맞았을 테니. 

하지만 사실은 그런 게, 그런 것까지가 전부 길고양이의 삶이 아닐까?

일주일이 지난 오늘에서야 그런 생각이 든다.

고양이는 자기가 선택한 자리에서 자존심을 지키며 죽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그 마음을 알았더라도 모른 척하기는 어려웠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