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우리가
나는 우리가 DJ와 애청자로 만나도 좋았겠다고 생각한다.
그는 지방 라디오 방송국의 심야 DJ, 나는 소설가가 꿈인 평범한 여고생.
책상 위에 라디오 카세트를 올려놓고 밤마다 그의 방송을 듣는다.
방송제목은 뭐가 좋을까... '한 밤의 음악 편지'?
그래 그게 좋겠다.
사실 그는 썩 훌륭한 DJ는 아니다.
말을 잘 못한다. 가끔 재미없는 유머로 듣는 사람을 민망하게 한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코코아. 따뜻한 코코아 같다.
나는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그를 좋아한다.
참고서 위에 낙서를 끄적이며 '한 밤의 음악 편지'를 듣는다.
그가 꽃다발을 들고 학교로 찾아와 내게 고백하는 상상을 한다.
사연은 보내지 않는다. 나는 그냥 그를 좋아하는 조용한 소녀팬이다.
기말 고사가 끝났다. 여름일까 겨울일까... 지금이 8월이니까 여름으로 하자.
1학기 기말 고사가 끝났다.
나는 시험을 망쳤고 속상한 마음에 그의 방송에 처음으로 엽서를 보낸다.
'오빠, 시험을 망쳤어요. 어쩌면 좋아요? 위로해 주세요.'
'한 밤의 음악편지'에는 그다지 많은 편지가 오지 않는다.
그는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오늘 도착한 엽서를 훑어본다.
내가 보낸 하얀색 엽서를 집는 순간, 왠지 모르게 기분이 좋아진다.
이 여학생을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시험을 망쳤다니... 속상하겠는 걸. 어떤 곡이 위로가 되려나?
레코드장 앞에서 한참을 서 있다.
여느때와 다름없는 방송.
나는 의자위에 무릎을 모으고 앉아 라디오를 듣는다.
내 엽서는 읽어주지 않는 걸까? 너무해. 입이 삐죽 내밀고 책상을 통통 찬다.
마지막 곡이 나올 차례다.
아! 그가 내 이름을 부른다. 내가 보낸 엽서를 읽는다.
코코아. 코코아 같은 목소리가 내게 말한다.
"현주양, 괜찮아요. 힘 내세요. 오늘의 끝 곡은 이현주양을 위해서 틀어 드립니다.
Earth,Wind & Fire의 September!"
전주가 나오는 순간, 가슴 속으로 바람이 화악 하고 밀려들어온다.
날아갈 것 같다. 시험을 망친 것도 까맣게 잊고 활짝 웃는다.
나는 노래에 맞춰 빙글빙글 돌며 춤을 춘다.
그는 방송을 마치고 스튜디오에서 나온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며 September를 흥얼거린다.
지금 듣고 있으려나?
멀리서 바람이 불어온다. 기분이 들뜬다.
마음이 춤을 추는 것 같다.
우리는 곧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