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다 인정한다구!
지금 조금 화가 나 있다. 나는 잊을만 하면 한번씩 죽고싶다고 생각한다. 열심히 할 땐 정말 미친듯이 하지만 금방 시들해지고 우울해지고 어느 틈엔가 살고 싶지 않아 중얼중얼 한다. 약을 먹기도 하고 화장실 문고리에 끈을 걸기도 한다. 영정 사진도 골라 놓고 토드는 누구에게, 내 향수들은 누구에게, 책이나 다른 물건들은 누구 누구에게... 정리도 한다. 그리고 장례식에는 하얀 국화 대신 빨간 풍선을 가져오라고 해야지 히히. 하지만 내가 그 모습을 볼 수 없다니 아쉽군. 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외로움을 많이 탄다. 그건 여자 친구들이 해결해 줄수 없는 종류의 외로움이다. 남자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말 하는 건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그런 건 지금 상관 없다. 화가 났기 때문이다. 나는 배밑창에라도 달라붙어야 살 수 있는 따개비 같다. 혼자 즐겁게 사는 법 따위 알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나 석유 고갈 따위에도 관심없다. 오래 살고 싶지도 않거니와 아이를 낳고 싶은 생각도 없으니 후손에게 물려줄 자연 같은 건 아무래도 좋다. 저축도 안 한다. 지금 사고 싶은 걸 지금 사면 그게 좋은 것 아닌가. 유기농 채소나 참살이나 스스로 몸을 돌보는 방법 어쩌구 하는 것들도 알고 싶지 않다. 나는 농약이 잔뜩 뭍은 레몬을 정수기 물에 담가 우려 먹고, 환경 호르몬이 팍팍 나오는 플라스틱 지퍼락에 샐러드를 담아 먹을거다. 트랜스 지방이 니글니글한 도넛츠에 이빨이 삭는 코카콜라를 배 터지게 먹고 소화가 안 되면 소화제를 먹을거다.
나는 미치게 외로운 적은 있어도 내가 이 따위 쓰레기 음식들로 배를 채우면서 막 살아도 되는건가 정말 틀려 먹었구나 라고 생각한 적은 없다. 일년 뒤 십년 뒤는 신경 안 쓴다. 오늘 밤에 눈을 감고 그대로 끝이면 좋겠다고 매일 매일 생각하는 여자애니까 당연한거다. 엄마는 내가 자살하면 후생에 고생하니까 그런 생각하지 말고 착하게 살라고 한다. 남 욕도 하지 말고 고기도 너무 많이 먹지 말고 화도 많이 내지 말라고 한다. 하지만 만약 내가 죽고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지 않다면 그건 내가 아닌거다. 그러니까 결국엔 죽으면 끝이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나는 시골에 내려가서 순리 대로 사는 사람들을 보면 좋다고 생각한다. 뭔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멋지다고 생각한다. 유기농 야채만 먹는 사람들을 까다롭다고 흉보지 않는다. 인디언처럼 에스키모처럼 살고 싶다고 말하는 남자를 만난다면 정말 근사해요! 라고 진심으로 말할 것이다. 나는 아무도 비웃지 않는다.
내 방에는 향수가 가득하지만 나는 비오는 날 산에서 나는 버섯 냄새도 잘 맡고 날씨 냄새도 잘 맡는다. 백화점에서 화장품 사는 걸 좋아하지만 올해는 꼭 봉숭아 물을 들여야지 하고 생각한다. 라일락은 노래하듯이 피고, 질 때는 가난한 향기가 난다는 것도 안다. 나는 보리의 책도 좋아하고 백화점 매대에 꽂혀있는 브로셔들도 좋아한다. 그래서 보리에 있을 땐 돈 냄새 나는 것들이 그리웠고 지금은 출판단지의 갈대밭 생각을 자주 한다.
지구 어딘가에 나 같은 남자가 분명 있을 것이다. 이왕이면 한국 사람이면 좋겠다. 나한테 그런 건 몸에 안 좋으니까 다른 걸 먹으라고 충고하는 대신 야 이것도 되게 맛있어 먹어봐 하는 남자. 현주야 올해는 아카시아를 따다가 향수를 한번 만들어보자! 라고 하면 나는 아냐 아카시아 향수는 벌써 나왔는 걸. 이라고 대답하고. 그래? 그럼 바나나 향수는 어때? 우리 부자가 될지도 몰라. 아하하. 바나나 리퍼블릭에 말해볼까? 라고 해야지. 내가 플레이보이 한국판이 나오면 편집장 하고 싶어 라고 하면 야 그거 끝내준다. 근데 월페이퍼는 어쩌고? 그럼 나는 아 맞다. 월페이퍼도 있었지. 몰라 둘다 멋진 것 같아. 맞아. 둘다 근사해 라고 맞장구 치는 유연한 취향을 가진 남자. 아 여기 까지 쓰고 보니 내가 왜 화가 났는지 조금 잊어버렸다. 아무튼 나는 어떤 면에선 헛똑똑이에 따개비 같고 등 누드 사진이나 블로그에 올리는 여자애지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좋아하고 좋아하는 사람이다.